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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영화보기

버닝 영화 줄거리, 버닝 해석

by 자립청년 20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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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넷플릭스에 들어가니 2018년 화제의 영화, 버닝이 올라와있었다. 

 

개봉과 동시에 영화관을 찾아가서 봤던 영화였고 꽤나 기억에 남아있는 좋은 영화였기에, 반가운 마음에 영화를 다시 보았다.

역시나 좋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글을 쓸까 하다가, 작년 6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밤에 썼던 글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뒤죽박죽한 글이 더 그때 버닝을 처음 본 순간을 잘 담아내는 날 것 같아서 이 글을 그대로 블로그에 옮기기로 결정.

 

영화 버닝Burning.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향해서 인지 모른 채 계속 뛴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어 애처롭다

결국 피 가족 현실 그리고 상황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얽매인다

과연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내가 믿는 것뿐인가 오로지 그것뿐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일까

계속 달려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울컥하는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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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감옥에 들어가고 난 뒤 송아지를 팔고 달리는 장면과

마지막 사람을 죽이고 태우고 속옷까지 다 벗고 차로 걷는 모습

차를 돌려 뒤쪽에 비추는 불빛과 끝 장면 이 두 장면에서 나는 울컥했다 왜인지 모르는 그러한 버닝. 

 

 

포르쉐와 낡아 빠진 트럭, 도시와 시골, 아스팔트와 논밭, 호화스러운 밝은 집과 어둡고 오래된 집, 벤과 종수의 모든 대비의 뚜렷함 그 틈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듯한 혜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한국의 신인 여배우는 정사씬을 찍어야 화제가 되는가였으며 아무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어도 애무와 자위 그리고 흥분 뭐 그런 정도만 보여줘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인터뷰 중에 성적인 요소를 언급한 부분을 보면 자위라는 건 혼자 하는 섹스인데 없는 데 있다고 생각하거나 없는걸 걸 잊어버리는 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종수의 자위는 그의 성적 욕망만을 들어내는 것도 요즘의 젊은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몸이 중요했다. 몸은 살아 있음 그 자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욱이 섹스가 아닌 애무 그 본질적 몸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 나는 사실  혜미의 연기가 부족해 보였다가 괜찮았다를 반복했는데 그래도 약간은 자유롭고 약간은 푼수 같은 이 캐릭터에는 잘 부합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윌리엄포크너와 무라카미하루키의 글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기존에 내가 읽은 한결같은 청춘을 담는 무리카미하루키의 철학 그의 세계가 충분히 드러났다. 이종수는 무라카미 자체였고 모든 것이 노을 같았다.

 

혜미가 초반에 기억나 어릴 때 네가 나한테 못생겼다고 한 거라고 말한 뒤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반복된다.

그리고 벤의 마지막 장면은 화장실 수납장에 있던 메이크업 박스를 꺼내 섬세한 손길로 다른 여자, 또 자른 혜미에게 화장을 해준다. 꾸미다 라는 단어와 소설가라는 종수의 직업은 알맞고 종수의 아빠가 분노조절 장애로 감옥에 가기 직전 그를 변호하는 친구 분이 종수에게 묻는 장면으로 다시 이어진다. 문예창작가라고, 그래 무얼 창작하고 싶나 라고. 그리고 벤의 집에 간 종수에게 벤이 다시 묻는다. 종수씨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세상은 저에게 수수께끼 같거든요. 이렇듯 영화는 앞 뒤 시간과 관계없이 장면을 잘라내어도 이어지는 흥미로운 구조를 가졌다. 변호사는 아빠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하고 벤은 언젠가 자기 이야기를 종수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그리고 거의 끝 자락의 장면에서 종수는 자신의 파주집이 아닌 혜미의 방에서 어쩌면 현실과 비현실 혹은 현실의 연장에서 글을 쓴다. 결국 누구의 이야기가 되었든 관객이 자기만의 서사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읽게 된다.

 

어떤 사람은 종수처럼 벤이 혜미를 죽였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내내 잔인한 장면은 하나 나오지 않고 (마지막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르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잔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벤이 혜미를 죽인 건지 혜미가 태워진 비닐하우스 인 거지도 알 수 없다. 단지 종수는 떠도는 각자의 진실들 중 하나를 잡는다. 그것이 혜미의 말을 진실로 믿는 것이었고 그는 글을 써내려 갈 뿐이다. 우리는 선택적 진실을 믿곤 한다. 벤의 의심스러운 말과 타이밍 그리고 다른 여자의 악세사리들과 혜미의 촌스러운 분홍색 시계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주 반복되는 단어 중에는 우물과 아프리카 구원의 춤 그리고 노을이 있다. 일곱 살 때인가 우물에 빠졌는데 몇 시간 동안 누군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라며 위를 올려다보고 울고 있는데 종수가 나타나서 구했다고 말하는 혜미의 말이 진실이든 마임 같은 상상이든 그 사실을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어쨌든 현실의 삶에서 혜미에게 종수는 우물에 빠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 그리고 반복되는 구원의 춤에 관한 이야기. 혜미는 종수의 현실 그러니까 종수의 파주 집 앞에서 노을과 함께 사라지듯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구원의 춤을 춘다.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혜미를 보는 두 가지의 시선 그리고 종수는 아무 데서나 옷을 벗고 다니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한다. 과연 이 말의 의미는 어쩌면 시대에 고리타분함을 지닌 남성성임과 동시에 종수의 아빠, 그 어쩔 수 없는 피, 환경으로 또다시 연결될 수도 있다.

 

어쩌면 소설가, 글을 쓰는 자, 그러니까 창작자의 상황 속에 서있는 이 세 사람 모두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다가 깨는 것을 반복하는 종수, 엄마와 개연성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전화는 종수를 방해하는 과거의 요인, 환경적 요인일 수도 있고 벤의 하품은 종수와 혜미의 진중함에 대한 비웃음이 될 수도 혹은 그 진중함의 지루하게 느껴지는 그대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세 세계는 함께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대마를 피운다. 

 

종수의 집에 그러니까 그의 현실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은 시대상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대한민국의 수많은 종수와 혜미와 벤 말이다. 벤의 세계에서는 혜미나 종수가 그저 하나의 재밌고 흥미로운 장난감이 되고 종수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두 존재가 되는 것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는 본인이 있는 곳으로 벤을 불렀고 벤을 차에서 내려 종수씨 잘 지냈어요, 혜미랑 있다면서요 라고 말을 하며 다가가고 순간 종수는 차에서 내려 벤을 찌른다.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관점을 선택하냐의 따라 해석이 무한하게 달라진다.

어쩌면 영화 초반부터 대놓고 언급하는 메타포처럼, 별거 없지만 메타포로 인해 상상에 상상을 덧 붙여서 진실에 혼란을 겪는 것인 줄도 모른다. 세상의 관념이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걸림돌 같은 벤을 찔러 죽인 후 겉옷에 이어 속옷까지 다 벗고 비닐하우스를 태우듯 벤과 벤의 차 포르쉐와 자신의 옷들에 불을 지르고 태초의 나체가 되어 터덜터덜 걸어 트럭에 올라 불타는 것들을 뒤로한 채 어디론가 차를 모는 장면은 우리의 현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목적을 잃고 무엇 때문에 왜 때문에 인지를 모른 채 끊임없이 배회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결국은 자기만의 이야기 모두가 현재 진행 중인 청춘인 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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